2025-06-17 IDOPRESS
[히코노미-24] 금발의 늘씬한 여인도,호수같이 파란 눈을 가진 신비로운 여자도,흑발의 동양미를 품은 이국의 여성도 아스라한 과거처럼 씻겨 나갔습니다. 인생의 진정한 사랑을 만나서였습니다. 몸도 펑퍼짐 하고,살은 쳐졌으며,나이도 많은 연상의 여인. 그런데 사내의 마음은 왜 첫사랑 앞에서처럼 요동치는 것인지.
사내의 아이를 마치 제 자식인 양 보살펴주는 너른 성격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성을 내고 역정이 나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미소를 잃지 않았습니다. 결코 사사로운 감정을 내세우는 법도 없었지요. 사내의 행복이 마치 그녀의 전부인 것처럼. 어려서부터 느껴본 적 없는 엄마의 사랑을 그녀로부터 발견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비극을 부르는 법이지...” 루이14세 초상화.
풍운아 루이14세
루이 14세. 프랑스의 절대왕정을 이끈 태양왕. 타고난 카리스마와 야욕으로 프랑스를 유럽 최고의 강대국으로 이끈 군주였습니다.
정치욕만 태양처럼 들끓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성욕 또한 엄청난 위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아내 마리아 테레지아의 시녀를 무수히 건드렸고,그것도 모자라 그들에게 엄청난 돈과 권력을 쥐어줬지요.가장 대표적 인물이 마담 몽테스팡. 1660년대 중반부터 10년 동안 루이 14세를,나아가 프랑스를 쥐락펴락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전하,제 욕실을 또 훔쳐보고 계신가요?” 몽테스팡 부인의 초상화. 왕비 마리아의 시녀로 궁정에 들어와 마침내 왕의 몸과 마음을 한 번에 빼앗은 요부 중 요부였습니다. 시녀 시절 자신의 목욕 장면을 루이14세가 훔쳐보고 있다는 걸 눈치챕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을 가리고 있던 수건을 부러 떨어뜨립니다.
루이14세로서는 유부녀인 몽테스팡을 애인으로 삼을 수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었지요. 그녀는 루이 14세의 사생아 7명을 낳았습니다. 프랑스의 국정은 몽테스팡을 통해 이뤄진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습니다.몽테스팡이라는 장미는 아름다운만큼 가시로 가득했습니다. 사치스러운 성품도 성품이거니와 질투가 너무 심해 루이 14세를 점점 옥죄고 있어서였습니다. 결국 사달이 벌어집니다. 1677년 9월 루이 14세가 새롭게 눈을 들이고 있던 퐁탕주 공작부인이 독살된 채 발견된 것이었습니다. 모두가 한 여인을 의심합니다. 몽테스팡이었습니다.
장기간 수사에도 몽테스팡이 살해에 연루된 직접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녀가 흑마술에 빠져 있었다는 사실은 확인됐습니다. 법적 처벌은 피했지만 이미 받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루이14세의 마음이 이미 그녀에게서 떠나 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녀는 자진해서 수녀원으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이 아이들을 어쩌고 저를 내치십니까...” 몽테스팡 부인과 루이14세 사생아들 .
순한 사람 몽테농에 빠지다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 주는 자극에 지쳐버렸기 때문이었을까요. 국정 운영에 지친 몸과 마음에 위안이 필요했기 때문이었을까요. 루이 14세의 눈에 한 수수한 여인이 들어옵니다. 쫓겨난 몽테스팡 부인의 시녀이자,자신의 사생아를 따스함으로 돌봐주던 그녀.
그러면서도 언제나 직언을 해주던 여인. 맹트농이었습니다.외모로 따지자면 몽테스팡에 비할 바 못 되었지만,내면의 강인함과 성정에서만큼은 맹트농을 따라올 사람은 없었습니다. 가시로 가득한 장미 몽테스팡에 받았던 상처를,백합과 같은 순결한 맹트농으로부터 치유받고 있던 셈이었지요.
“걱정마세요,몽테스팡,아이들은 제가 돌보겠습니다.” 루이14세의 아이들을 돌보는 맹트농 부인. 40대 중반으로 이미 외면의 아름다움은 빛바래 있었지만 상관없었습니다.
맹트농이 주는 놀라운 만족은 육체와 정신을 모두 아울러서였습니다. 이제 몽테스팡의 자리는 어느덧 맹트농 부인의 차지였습니다. 왕비 마리아가 사망한 직후에는 루이 14세가 그녀와 비밀 결혼을 올렸을 정도였지요. 정부(情婦)와 통상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을 고려하면,그가 얼마나 맹트농 부인을 사랑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아름다움은 언제나 마음 속에 있는 것이랍니다.” 몽테농 부인.
가톨릭 국가로 대전환 이뤄지다
“전하,프랑스는 가톨릭의 나라로,신의 뜻을 받들며 운영되어야 합니다.”
맹트농의 경건하고 엄숙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했습니다. 침실에서 그녀는 속살거리면서 가톨릭을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당시 프랑스는 종교적 자유가 보장된 나라. 루이 14세 할아버지 앙리 4세가 국가의 분열을 막기 위해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는 낭트칙령을 발표한 덕분이었습니다. 구교와 신교는 여전히 서로를 미워하고 증오했지만 서로를 이웃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국법으로써 보장된 권리여서였습니다.
“전하,프랑스가 약한 건 모두 신교도들 때문입니다.” 맹트농 부인 초상화. 맹트농 부인은 루이 14세에게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프랑스가 위기에 빠진 것은 나라가 분열해 있기 때문이라고. 신교도인 위그노들이 하나의 프랑스를 찢어 발기고 있는 것이라고.
루이14세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믿고 의지하는 맹트농 부인의 말에 현혹되고 있었던 것이었지요.
위그노 이단만 정리하면 프랑스가 다시 위대해질 수 있다는 말에 루이 14세는 결단합니다. 프랑스를 다시 깨끗한 가톨릭의 나라로 만들겠다고. 더러운 이단들이 사라진 순수의 나라로 만들겠다고. 1685년 내려진 퐁텐블로 칙령이었습니다.프랑스는 가톨릭의 나라이며,다른 종교를 믿을 자유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가톨릭 교도들은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신교도들을 더 이상 용인하지 않아도 됐기 때문입니다. 흥분한 일부 군중은 무기를 들고 신교도들을 찾아 다닙니다. 학살을 위해서였습니다. 비루한 삶을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경건한 여인 맹트농이 부른 피의 현장이었습니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고,성당이 싫으면 개신교가 떠나야지...” 프랑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 낭트칙령을 폐지한다는 내용을 담은 퐁텐블로 칙령.
프랑스에서 쫓겨난 신교도
“이제 더 이상 프랑스에서 살 수 없다.”
신교도들은 대규모로 프랑스를 떠나야만 했습니다. 종교적 자유를 위해서,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1685년 직후 프랑스를 떠난 인구는 최소 20만이 넘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들의 상당수는 숙련장인이나 상공인이었습니다. 도시의 경제를 움직이는 윤활유 같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개신교도들 다 꺼지라고.” 구교도 군대인 드라곤 군이 신교도 집을 습격한 장면. 프랑스 화가 쥘 지라르데의 그림. 찬란하게 빛나던 프랑스의 도시들은 그 빛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위그노들이 주로 종사하던 모직물과 실크 산업이 완전히 정지될 상황에 처해 있어서였습니다.
금융에서도 학술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인력이 사라진만큼,지식도 돈도 증발해버렸습니다. 종교적으로는 단일대오를 유지했을지 모르지만,프랑스의 국력은 그만큼 약해지고 있었습니다.루이14세와 맹트농은 경제의 복잡성과 국부의 원천을 몰랐습니다. 퐁텐블로 칙령 100년 후 프랑스에 대혁명이 일어난 건 어쩌면 우연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약한 경제는 언제나 정치적 위기를 부르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냥 신교하게 해주세요...” 후대 영국화가 존 에버렛 밀레이가 묘사한 위그노.
난민을 받아 부국을 꾀하다
프랑스의 위기에 미소짓던 남자가 있었습니다. 조국을 떠난 위그노들이 보석같은 인적자원이라는 걸 잘 아는 인물. 독일 프로이센의 지도자 프리드리히 빌헬름이었습니다.
30년 전쟁(1618~1648년)으로 초토가 되어버린 국토를 되살리기 위해 밤낮으로 고민했던 지도자였지요.신이 프리드리히의 기도에 응답했던 것이었을지. 프랑스에서 신교도들이 대규모로 쫓겨났다는 소식이 보고됩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은 퐁텐블로 칙령이 발표된 해에 포츠담 칙령을 발표합니다. 위그노들에게 종교의 자유와 여권 발금,정착지원금을 보장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10년동안 세금을 면제한다고도 덧붙입니다. 그야말로 특급 대우.
“구텐탁,난민 여러분. 이곳이 여러분의 새로운 조국입니다.” 1685 년 포츠담 궁전에서 위그노 난민을 맞이하는 프리드리히 대선제후. 순식간에 위그노 난민 2만명이 프로이센에 둥지를 틀었습니다. 1700년 프로이센 수도 베를린 인구 4분의 1이 프랑스계 이민자였을 정도였습니다.
도시는 언제나 사람으로 흥하고 사람으로 망하기 마련입니다.
위그노는 프로이센의 공장이자,시장이었고,문화이자 경제였습니다. 프랑스 난민들의 영리함과 성실성이 프로이센에 활기를 불어넣었습니다. 프랑스가 자랑하던 모직물이 이제 독일에서 생산됩니다. 공장이 늘어나고,수출이 증가합니다.포츠담 칙령이 발표된 1685년 베를린 직조기는 20대 미만이었지만,1800년대는 300여대로 늘어납니다. 산업화가 꿈틀대고 있었다는 의미였지요. 세수가 늘어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늘어나는 세입은 화약·무기 등 군수산업에 재투자됩니다.
“이젠 우리도 도시 국가가 아닌 왕국이라네.” 위그노를 받아들인 이후 프로이센의 국력은 급격히 신장해 1701년 결국 공국에서 왕국으로 승격되기에 이르렀다. 프리드리히 1세의 대관식. 1700년 설립된 프로이센 왕립 과학아카데미에서 활약한 회원 중 60%가 프랑스 출신이었습니다.
프랑스의 지력이 그대로 독일로 옮겨오고 있었다는 의미였지요. 프로이센은 이제 더 이상 독일의 소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유럽의 강자였습니다. 1740년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이 7년 전쟁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위그노 난민이 부른 나비효과는 1870년 절정에 달합니다. 프로이센이 넘치는 국력으로 독일을 통일하고 파리를 점령합니다. 그 유명한 보불전쟁이었습니다. 파리 개선문으로 입성한 프로이센 군인의 일부는 울면서 조국을 등져야 했던 위그노의 후손이었습니다. 자신의 할머니,할아버지를 내쫓았던 조국을 손자들이 총칼을 들고 다시 돌아온 역설의 현장이었습니다. 맹트농 부인의 종교적 편집증이 불러온 비극이었습니다.
“저 용맹한 독일 놈들이 프랑스 위그노의 자식들이라고?” 프로이센과 프랑스 전쟁 세단 전투에서 대패 후 귀환하고 있는 프랑스 지도자 나폴레옹3세.
맹트농의 재
올해,지구 곳곳에 맹트농이 재림하고 있습니다. 세계가 다시 국경의 장벽을 높이고 있어서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민을 제한하고,지성의 전당인 대학을 미국인으로만 채우려고 하고 있습니다. 프랑스의 위그노들이 조국을 등진 것처럼,미국의 지성들도 새로운 둥지를 찾아 떠날 조짐입니다. 유수의 언론들이 “미국에서 두뇌유출이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하는 이유입니다.지난달 29일 열린 하버드 케네디 스쿨 졸업식에서 학생들이 지구본을 들며 외국인 입학을 규제하려는 트럼프 행정부에 항의 표시를 전하고 있다. [AFP연합] 미국은 이민자로 위대해진 나라였지만,이제 그 성공방정식을 폐기하려 하고 있습니다. 국가경쟁력의 근간인 개방성과 다양성은 이제 밑동이 잘려버린 고목과 같습니다.
경제사는 말해줍니다. 외국인에 미소를 지었던 나라는 경제적으로 웃을 것이고,이방인을 향한 찡그림은 결국 저주로 돌아올 것임을.
프랑스의 루이 14세와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두 지도자가 우리에게 증명한 또 하나의 교훈입니다.“사람이 언제나 국부의 원천이었지.” 위그노 난민을 받아들인 프로이센 지도자 프리드리히 빌헬름.
<네줄요약>
ㅇ프랑스 루이 14세는 애첩 맹트농 부인에게 빠지면서 가톨릭 근본주의 국가 체계를 수립했다.
ㅇ신교도 위그노를 대거 내쫓으면서 결국 인적자본 유출로 이어졌고,국가 경쟁력이 훼손됐다.
ㅇ이웃 프로이센은 위그노 난민을 수용해 국부를 키워 1870년 결국 파리 점령까지 성공한다.
ㅇ외국인을 배척한 나라와 포용한 나라의 희비가 엇갈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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